LOT 52

Lee JoongSeop (1916 - 1956)

Artist Drawing His Family

incising and oil on tinfoil

15×10cm

Estimate KRW 30,000,000 ~ 120,000,000 USD 22,000 ~ 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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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
『이중섭 평전』, 돌베개, 2015, p.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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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Infomation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곳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이준 (삼성미술관 Leeum 부관장)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미 군정 시기와 좌우익의 대립 등 한국 근대사 시련의 시기를 고스란히 살다간 이중섭은 그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다. 그는 이 모든 세월을 가난과 시련 속에서 보냈지만 그의 작품은 가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의지가 투영된 걸작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한 이중섭은 평양 공립 종로보통학교 5학년 재학 시절부터  종종 수채화 풍경을 그리며 교내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0년에 그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하숙 생활을 하며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과 일체감을 익혔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중섭을 대표하는 ‘소’ 그림은 오산학교 재학 시절 받은 민족 교육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참고도판 1).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소는 한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동물로, 일본인들은 소에 대한 표현을 금지하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 가운데 황소나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소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도판 1) 이중섭, <흰 소>, 종이에 유채, 30x41.7cm, 1954,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9022677&menuNo=200026)

당시 오산고보 교사였던 임용련은 이중섭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주었는데, 민족적인 감각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새로운 사조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평양 근처 진남포에서 태어나 배재중학 3학년 때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최고의 미술전문학교였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학교에서 역사화와 벽화를 공부한 인재였다. 졸업 후에는 동부의 예일대학으로 편입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장학생 자격으로 1년간 파리로 연수를 가 그곳에서 조선 최초의 여류 재불 화가 백남순을 만나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서양화의 본고장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30년 합동 전시회를 열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였다.

이중섭이 훗날 동경 제국미술대학에 입학, 이듬해인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분카학원으로 옮기며 일본에서 활동할 때에도, 자유미술가협회전에 황소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할 정도로 일본 유학기에도 오산학교 시절 받은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졸업 후에도 자유미술가협회(미술창작가협회)를 중심으로 출품하던 그는 이쾌대, 진환, 최재덕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개인적으로는 1945년 분카학원 재학 중에 만나 교제하던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고 아들 둘을 연달아 얻었으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월남하여 부산, 통영,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전쟁통에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만큼 그는 가난했다. 결국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로 그는 항상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작품에 새겼다. 이 시기 은지에 그려진 작품은 이처럼 그리운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거나, 가족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모습을 새긴 작품들이다(참고도판 2). 


참고도판 2) 이중섭, <아이들>, 은지에 새김, 유채, 8x14.5cm

1956년 간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작품 대부분의 주제는 가족과 아이들이었다(참고도판 3). 전쟁 후 통영으로 거처를 옮기며 장욱진,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 등과 함께 활발히 전시회를 가졌고,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45점의 작품을 출품하며 그는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는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끝없는 생활고와 누구보다 사랑했던 가족과의 이별이 건강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정신분열증에 거식증, 영양실조가 겹쳐 쇠약해진 그는 결국 간암으로 외롭고 고단한 생애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참고도판 3) 이중섭,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 종이에 유채, 40x27.8cm, 1954

하지만 이중섭은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도 자신의 고뇌와 고통을 독창적인 예술 언어로 화폭에 담았다. 전쟁의 참화가 가져다준 비극과 가난, 궁핍함이 오히려 이러한 예술적 형식과 그 속에서 피어난 창작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에 많은 화가들이 서구 미술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그는 서양의 표현 기법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감수성과 정서로 자신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민족에 대한 순박한 신념이 아름답게 형상화된 초기 작품에서 근대사회에 대한 분노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이 표출된 후기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중섭의 작업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35 일본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중퇴
개인전
202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1 이중섭미술관, 제주
2018 이중섭미술관, 제주
2016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6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1972 현대화랑, 서울
1955 미도파화랑, 서울

외 다수
Video references for this artist
  • 작가소개 : EBS 문화센터, 신화가 된 화가 이중섭 (출처 : EBS)

  • 작가소개 : 민족화가 이중섭, 불운의 시대를 살다 가다 (출처 : 통일부 UNITV)

  • 뉴스 : 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021 (출처 : YTN)

  • 작가소개 : 지식채널E (출처 : 류재원)

LOT 52

Lee JoongSeop (1916 - 1956)

Artist Drawing His Family

incising and oil on tinfoil

15×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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